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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슈

월맹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베트남전의 강철부대 한국군의 전투력! 한국군과의 교전은 무조건 피하라!

by Mynickname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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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한국군 참전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가졌던 최고의 전쟁 무기는 바로 한국군이라고 할 정도로 1965년 한국군이 파병을 결정함과 동시에 베트남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베트남전은 한국군의 막강한 전투력이 가장 잘 드러났던 근대 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베트남에서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1965년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총 8년에 걸쳐 한국군을 파병합니다.

부산항에서 파병장병 환송식입니다.
부산항에서 파병장병 환송식

□ 참전기간 : 1964.09 ~ 1973.03

□ 참전인원 : 325,517명 (5,099명 전사 / 11,232명 부상)

□ 평균나이: 21.6

□ 파병부대 :

  • 총 사령부 주월 한국군사령부
  •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 수도사단 맹호부대
  •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
  •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
  • 공군 지원단 은마부대
  • 제100 군수사령부 십자성부대

 

다른 참전국을 놀라게 한 강철부대 한국군의 전투력

미국의 막대한 돈과 무기로 밀어붙이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트남전은 북베트남군의 예상보다 강한 전투력과 남베트남에서 민간인들과 합세한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으로 매우 힘든 싸움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베트콩들은 베트남 민간인들 사이에 섞여 지내며 거짓 정보를 제공하고 아군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몰살시키거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유인한 후 갑자기 주민들이 숨겨두었던 무기를 꺼내어 아군을 사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그 골치 아픈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해결사가 한국군이며 한국군이 파병되자마자 베트남전은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풍부한 전투 경험을 보유한 베테랑 군인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전투력은 막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병사 1명의 전투력을 나타내는 사상자 교환 비율 기록을 보면 미군이 대략 9:1을 기록했습니다. 즉 미군 1명이 9명의 적군을 살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군은 파병 초기부터 25:1을 기록하더니 전쟁 후반기에 가서는 무려 100:1까지 그 수치를 올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쪽의 수가 비슷한 전투가 벌어지거나 아니면 한국군의 수가 조금이라도 많은 경우에는 한국군에 의한 일방적인 살육전이 벌어졌고 그런 상황은 한국군이 진행한 59천 번의 작전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미군이 노획한 베트콩의 교전 수칙서에 따르면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한국군과의 전투는 무조건 피하라는 명령이 일반 병사들에게 하달되었을 정도입니다. 당시 월맹군들에게 한국군은 단지 적군이 아닌 저승사자에 가까운 공포의 존재들이었습니다.

 

 

교전중인 한국군 입니다.
교전중인 한국군

한국군들은 특히 두려움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미군들이 꺼려하는 위험한 작전에서 큰 성과를 내어 다른 참전국들의 찬사를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맹군들은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피하고 미군들로 이루어진 부대만을 골라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는 한국군이 있는 곳이 베트남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미군들은 만약 자기 부대 내에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으면 그들의 존재를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 하원 국방위원장의 발언에서 한국군의 전투 방식을 엿볼 수 있는데 미군의 경우 수세에 몰리면 일단 뒤로 물러나 포격 지원을 요청하는데 한국군 일단 공격을 받게 되면 사격이 들어온 방향을 즉각 파악하여 부대를 2~3개로 신속하게 나누어서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한 후 동시에 공격하여 한 번 들어온 적이 절대 살아서 도망칠 수 없도록 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미군이 몇 년간 점령하지 못한 요새를 한국의 해병대가 작전 개시 단 2시간 만에 적군을 제압하고 요새를 탈환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유명한 청룡부대의 일화입니다. 1967년 짜빈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 11 중대 70여 명은 적 3개 대대의 2,000여 명의 병력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총공격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청룡부대는 기관총이나 포탄 보급을 전혀 받지 못해 무기와 탄약 역시 AK소총과 기관포 등으로 무장한 적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이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청룡부대의 궤멸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룡부대는 탁월한 전략과 5시간이 넘는 백병전을 치러내며 결국 승리하였고 퇴각하는 적을 끝까지 쫓아가 대부분을 사살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국 대통령 역시 그 용맹함을 기리며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작전중인 한국군입니다.
작전중인 한국군

 

한국군의 대민지원

한국군은 전투를 치를 때는 무자비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함께 한국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월남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민활동이었습니다. 한국군들은 월남인들에게는 단순히 친절한 것을 넘어 수시로 대민지원을 하여 그들의 삶을 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고보이 사례인데 맹호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고보이 지역에서 그 지역 월남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자 맹호부대는 직접 나서서 그들이 농사를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댐을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에 대서 특필되었고 영국 런던 타임지에서는 미군들이 한국군의 이런 고보이 정신을 배울 수만 있었다면 베트남전을 진즉에 승리했을 것이라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대민지원 표지 입니다.
민간인 보호를 위한 표지 

 

베트남전의 성과

베트남전은 이제 벌써 50년도 더 지나버린 과거가 되어 서서히 잊혀가는 전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기근과 폐허의 나라였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기아의 나라였습니다.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파병 군인들은 가난했던 조국을 위해 자신의 피를 팔아 달러를 벌어 왔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를 건설하였으며 파병 직전 1964년 한국의 1인당 GNP인 103달러는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이 향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M1 소총과 같은 재래식 병기와 군용 장비에서 M16 소총 등으로 병기와 군용 장비가 근대화 개량이 이루어졌습니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은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나라로 인식된 대한민국이 어려움과 빈곤에 처한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로 국제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오늘날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의 애국심과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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